"종전선언 구속력 없다"더니 최종건 "누구도 못 벗어난다"

박현주 2021. 11. 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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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방문 중인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이 15일(현지시간)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사실상 지속성을 지닌 제도화의 의미를 강조했다. 앞서 정부가 종전선언과 관련한 국내외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며 언제든 되돌릴 수 있고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설명한 것과 모순된다는 지적이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공동 주최로 열린 한미전략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① 종전선언 앞세우며 “누구도 못 벗어난다”


최 차관은 이날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공동 주최한 한ㆍ미 전략포럼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관련해 "누구도 쉽사리 벗어날(walk away) 수 없는 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그 방안으로 종전선언을 꼽았다. 그는 또 "(정부가) 대북 관여 정책에 있어 계속 유지되는(enduring) 틀을 구축하는 데에 집중해왔다"고도 강조했다.

종전선언을 '지속성을 지닌 틀'로 규정한 이날 최 차관의 발언은 앞서 정부가 종전선언의 구속력과 관련해 각급에서 앞세웠던 설명과 배치된다. 그간 정부는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니 부담 없이 이를 고리로 북한과 비핵화 대화를 시작하자는 이른바 '종전선언 입구론'을 펼쳤다.

지난 2018년 9월 문 대통령은 미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앞서 외교부 당국자도 지난달 28일 기자들과 만나 "종전선언은 조약이 아니므로 법적인 효과는 일절 없다"며 "법적 구속력 없는 선언문이라는 건 한ㆍ미는 물론이고 북한도 인정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측은 이같은 주장을 쉽사리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종전선언이 지닐 파급력과 의도치 않은 부작용의 가능성을 따지기 위한 법적 검토에 착수한 상태다.

이날 최 차관의 발언은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 측의 우려가 타당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다. 종전선언의 구속력 여부는 논의의 핵심인데, 고위 당국자가 한국 정부가 그간 공개적으로 표명해온 입장과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은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의도와 직결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종전선언의 핵심 사항인 '순서ㆍ시기ㆍ조건'을 콕 집어 "한ㆍ미 간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KF)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공동 주최로 열린 한미전략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주한미국대사관.


②정전체제 영향 없다더니…


이날 최 차관은 "정부는 종전을 통해 비핵화에서 불가역적인 진전을 만들고 비정상적으로 긴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시작하려 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건 종전 선언이 아닌 '평화 협정'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전직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사실 종전선언만으로는 종전이 오지 않는다"며 "평화협정을 해야 법적으로 종전이 됐다고 보며, 비로소 정전 체제도 평화 체제로 바뀌게 된다"며 그 차이를 설명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1항으로 다루는 게 적절하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특히 미국은 종전선언 논의가 처음 시작된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부터 종전선언이 마치 평화협정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 북한 비핵화 전 종전선언이 이뤄지는 데 대해 경계심을 보여왔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종전선언이 현 정전협정 체제에 미칠 영향이다. 종전선언으로 자칫 정전 협정 체제가 흔들릴 경우 이는 유엔사령부의 지위와 미군 주둔의 정당성 문제로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종전선언은 평화협정과는 별개"며 "종전선언을 해도 정전체제에 영향은 없다"는 입장을 피력해왔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달 28일 기자들과 만나 '종전선언이 아무리 법적 구속력이 없다고 해도 북한이 유엔사의 지위를 문제 삼는 등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정전 협정은 종전선언과 무관하다"며 "유엔사는 정전협정이 아닌 유엔 안보리 결의 때문에 나온 것이며, 한ㆍ미 동맹은 한ㆍ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양자 간 조약상 의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최 차관의 발언은 '정부의 실제 의도가 결국 종전선언을 평화 협정의 포석으로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해당 발언이 최근 종전선언 관련 북한의 주장을 강화하는 데 역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9월 이태성 북한 외무성 부상은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종이 장에 불과한 종전선언이 우리에 대한 적대시철회에로 이어진다는 그 어떤 담보도 없다"며 "아무런 법적 구속력도 없는 종전선언문을 들고 사진이나 찍으면서 의례행사를 벌려놓는 것"을 비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최 차관이 이날 연설에서 종전선언보다 더 나아간 평화협정에 준하는 개념까지 시사하면서도 이를 위해 필수적인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단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선 확실히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핵화 조치를 북한으로부터 담보 받지도 못했는데 종전선언으로 비핵화 대화의 입구부터 뚫고 나면 언젠가는 비핵화 진전을 이룰 거라는 정부의 구상이 막연한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021년 북한 미사일 발사 일지.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③“9ㆍ19 군사합의 덕 대화 집중”


최 차관은이날 9ㆍ19 남북 군사합의를 지난 2018년 이룬 성과로 내세우며 “남북이 비핵화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줬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북한이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에 해당하는 탄도미사일 발사 등 올해만 여덟 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감행했는데도 정부는 자꾸 현실과 동떨어진 분석만 국내외에 내놓는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 남북 간 비핵화 대화는 2019년 2월 하노이 노 딜 이후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최 차관은 앞서 지난 9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북한의 영변 핵시설 재가동 정황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9ㆍ19 군사합의 등 남북 합의 위반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도 지난 4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북한의 2019년 11월 서해 창린도 해안포 사격과 지난해 5월 북한군의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총격 사건에 대해 "9·19 남북군사합의의 사소한 위반"이라며 "굉장히 절제된 방식이었다"고 말한 뒤, 논란이 커지자 "적절한 용어 선택이 아니었다"며 해명한 바 있다.

한편 최 차관은 이날 군부 쿠데타가 10개월째 접어든 미얀마 상황과 관련해 "한국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다"며 "오늘날의 미얀마를 보면 어제의 광주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언급하며 미얀마 내 민주주의와 인권 침해 실태를 지적한 것인데, 북한 인권과 관련한 발언은 이날 연설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정부는 올해로 3년째 유엔 총회 북한인권 결의안의 공동제안국에서도 빠졌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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