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트북을 열며] 지구에서 한국뿐

전수진 입력 2021. 05. 26. 00:27 수정 2021. 05. 26.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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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투데이·피플 뉴스 팀장

지금은 2121년, 여긴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작은 벽돌집이다. 봄이면 이곳 특유의 뾰족뾰족한 사이프러스 나무는 연녹색으로 갈아입는다. 예쁜 여린 잎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태어나 얼마나 다행이니.” 그리곤 산지오베제 와인 한 모금. 할머니의 할머니가 떠올라서인 것 같다고, 나는 짐작한다. 꼭 100년 전, 한국에서 태어난 그분. 코로나19라는 팬데믹 역병이 불었을 때 방역도 잘했고 방탄소년단(BTS)을 배출한 나라. 교과서론 배웠지만, 가볼 수는 없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도망쳤다. 20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게 문제였다. 그즈음 한국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서로를 극도로 미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대인 나도 짝꿍 남자애 미켈레와 매일 싸우는데, 남녀 싸움은 흔한 거 아닌가 싶지만 할머니는 절레절레. “심각했어. 정치인들이 그 갈등을 이용하고 조장하고 난 뒤엔 더욱.” 처음은 군대가 이슈였다고. 휴전 상태인 한반도의 남자들은 병역 의무를 졌는데, 일부가 왜 우리만 가냐고 반발했단다. 일부 여성들은 발끈해서 그럼 남자도 애를 낳아라, 생리를 해라, 우린 1000년을 차별당했다고 맞받아쳤다고. 참 이상하다. 21세기 하고도 21년이 지나 그런 논쟁을 해야 했다니. 존경받는 원조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남자도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에세이를 쓴 건 1986년이었는데.

노트북을 열며 5/26

다시 100년 전 한국. 선거에서 일명 ‘이대남’이라 불린 20대 남자를 대표하겠다고 나선 세력이 이겼고, 곧 여자도 군대에 가게 됐다. 남자들은 곧 깨달았다. 이긴 게 진 거였다. 시간이 갈수록 현대전에선 여성이 더 뛰어난 병력임이 드러났고, 여성의 입대로 출산율은 0으로 빠르게 수렴했다. 급기야 급진 안티 페미 남성과, 포섭된 일부 여성들이 나섰다. 국가의 존망을 위해 여성은 출산과 육아에 헌신해야 한다고. 남녀고용평등법은 폐기됐고, 개헌이 뒤를 이었다. 여성은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다. 유엔이 우려를 제기했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경제 제재를 가했으나 표심에 눈이 먼 정치인들은 날치기 통과. 할머니의 할머니와 그 친구들은 편도행 항공편을 끊고 고국을 등졌다.

지금도 한국의 체제 선전 달력엔 아이를 안고 활짝 웃는 여성이 등장한다. 희한한 건 남이나 북이나 ‘세상 부러움 없어라’고 주장한다는 것.

어쨌든 학교에 가는 게 좋은 소녀인 나는 생각한다. 할머니 말이 맞아, 여기에서 태어난 게 다행이야. 아직 한국 여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시절, 정세랑 작가가 쓴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에서처럼 우주로 도망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가 사랑했던 한국은 그렇게 슬픈 뒤안길로 사라졌다.(※100년 후 이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전수진 투데이·피플 뉴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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