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죽어가는데 편히 있겠냐" 도청 사수한 63살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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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 아버지네."
1980년 5월27일 상무충정작전(광주진압작전)이 끝난 후 옛 전남도청에서 붙잡힌 아버지 이종기(당시 63살) 변호사가 군용버스에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도청에서 이 변호사와 같이 있었던 김태찬(60)씨는 "이 변호사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집에서 편히 있겠냐. 자네들하고 같이 하려고 왔네'라며 도청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총을 내려놓으라며 '자네들이 살아남아서 증언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 큰 의지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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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진입 소식에 '죽음의 행진' 총부리 아랑곳 않고 군과 협상
시민군 활동했던 아들 충영씨 "해방 광주, 아버지 바라던 세상"
“아, 우리 아버지네.”
13일 이충영(60)씨는 ‘노먼 소프 기증자료 특별전’(옛 전남도청 별관, 5월7일∼7월31일)에 걸린 한 사진을 보고 짤막하게 탄식했다.
1980년 5월27일 상무충정작전(광주진압작전)이 끝난 후 옛 전남도청에서 붙잡힌 아버지 이종기(당시 63살) 변호사가 군용버스에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민군이었던 이충영씨는 “27일 새벽 광주 계림초등학교 인근을 경비하다 군인에게 붙잡혔다. 아버지가 수습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도청에 남아계시다가 붙잡혔을지는 생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변호사는 1973년 대통령 명예훼손과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시대를 한탄하며 유신정권이 무너지기만을 기다렸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이 변호사는 “명예와 지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달도 채 안 돼 12·12 쿠데타가 일어나며 이 변호사는 또다시 좌절에 빠졌다. 그러던 중 5·18민주화운동을 맞았고 그는 5월21일 도청으로 향했다.
이충영씨는 “21일 오후 군인들이 시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중학생까지 총을 들고 다니자 아버지는 ‘큰일이 생길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대항하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여기셨다”고 설명했다. 이 변호사는 22일 도청 부지사실에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며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이 변호사는 ‘온건파’로 분류된 수습위원이었다. 시민이 총을 들어봤자 살인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의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무기를 회수, 반납하는 조건으로 계엄군과 협상을 하자는 쪽이었다.
26일 계엄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 변호사 등 수습위원 16명은 도청부터 광주 서구 농성동 차단지점까지 3.5㎞를 걸으며 ‘죽음의 행진’을 펼쳤다. 농성동 차단지점에서는 탱크를 앞세운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과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위인백(73) 전 5·18교육관장은 “농성동에 도착하니 주변 건물 2층에서 군인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섬뜩했다. 이 변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협상에 임했다”고 기억했다.
계엄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온건파는 26일 밤 수습위원회 회의에서 “무기를 회수해 희생을 줄이자”고 주장했다. 강경파는 “불명예스러운 항복을 할 수 없다. 도청을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며 반대했다. 이때 대부분의 수습위원은 도청을 떠났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이 변호사는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도청으로 향했다. 말리는 부인에게 그는 “어찌 모르는 척할 수 있느냐.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도청에서 이 변호사와 같이 있었던 김태찬(60)씨는 “이 변호사가 ‘젊은이들이 죽어가는데 나이 먹은 내가 집에서 편히 있겠냐. 자네들하고 같이 하려고 왔네’라며 도청으로 오셨다. 우리에게 총을 내려놓으라며 ‘자네들이 살아남아서 증언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셔 큰 의지가 됐다”고 말했다.
1980년 10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형 집행면제로 풀려난 이충영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 이 변호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5·18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충영씨는 “아버지는 온건파였지만 누구보다 항쟁이 지속되기를 바라셨던 분이다. 80년 5월 해방 광주는 어쩌면 아버지가 꿈에 그리던 세상이었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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