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슬그머니 TV로 돌아오는 술 PPL

입력 2021. 02. 0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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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기관(IARC)에서 ‘확실한 발암물질’로 분류한 1군 발암물질은 현재 총 120종이다. 이 가운데 현재 국내에서 지상파 방송으로 광고할 수 있는 소비재는 사실상 3가지다. 가공육과 경구피임약 그리고 술이다. 함께 1군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담배는 방송에서 광고할 수 없고 흡연 장면조차 등장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술은 광고도 가능하고 음주 장면 역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오는 6월부터 그나마 가로막혀 있던 주류에 대한 가상·간접광고(PPL)마저 방송통신위원회가 허용하겠다고 밝히며 파장이 일고 있다. 드라마에서 배우가 자연스레 술을 마시며 특정 주류를 광고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볼 수도 있게 된 것이다.

SBS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의 두 주인공이 극 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 SBS
방통위가 지난 1월 13일 발표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알코올 도수가 17도 미만인 주류의 가상·간접광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주류 광고를 규제하는 법령은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으로,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에서 모든 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후 10시 이후 심야 시간에만 주류 광고가 가능했으나 그동안은 가상·간접광고는 막아왔던 데 비해 오는 6월부터는 가상·간접광고까지 허용한다는 것이 방통위의 방침이다.

방통위, 6월부터 술 가상·간접광고 허용

해당 시행령 개정안과 함께 발표된 ‘방송시장 활성화 정책방안’이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의 중간광고를 허용하는 등 광고 분야의 굵직한 변화를 담고 있어 주류 광고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알코올 의존 예방 활동에 나서는 전문가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지났을 정도다. 이해국 중독포럼 상임이사(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음주를 비롯해 암을 유발하고 공중보건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한 강도를 높이는 세계적 추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규제를 풀며 역행하는 정책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장 예상되는 변화는 지상파와 종편을 가리지 않고 인기 있는 드라마·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들이 특정 상표의 술을 노골적으로 홍보하며 마시는 모습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기쁘거나 슬픈 일을 겪을 때 소주나 맥주를 마시며 감정을 발산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도 있고, 아예 대놓고 광고상품을 언급하며 ‘광고주의 도움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고 언급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PPL 추세를 감안하면 출연진들이 주류 상표 이름을 환호하는 모습이 나올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주류광고의 내용과 기준을 정하는 국민건강진흥법 시행령조차 ‘음주행위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음주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표현’ 등만 통제한다면 사실상 주류 광고의 내용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련 당국에서 서로 엇박자를 내고 있는 모습도 발견된다. 방통위가 1월 13일 관련 정책을 발표한 뒤 불과 2주 만인 지난 1월 27일 보건복지부는 ‘제5차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을 내고 “술 소비를 줄이는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주류에 대한 건강증진부담금 부과 등 가격 정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주류 광고가 금지되는 시간대(오전 7시~오후 10시)에 광고 금지 방침을 적용하는 매체를 TV 방송에서 인터넷 방송 등으로 확대하겠다고도 밝혔다. 이전부터 논란이 돼왔던 광고 모델 사진의 술병 부착 여부도 금지하는 쪽으로 규제가 강화할 예정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계획에도 주류 광고의 전면 금지는 포함되지 않은데다 PPL의 특성상 원래는 주류 광고 허용 시간대에 방영됐던 프로그램이 광고 금지 시간대에 재방송될 여지도 커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프로그램의 일부로 포함된 PPL은 별도로 편집하지 않는 이상 해당 품목의 광고를 금지한 시간대에도 버젓이 방영될 수 있고, 인터넷 다시보기 등을 통해 시청자가 아무런 제약 없이 볼 수도 있다.

배우 음주 장면 여과없이 볼 수 있어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공적인 절주 정책을 주관하는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불과 한달여 전인 지난해 12월 10일 개최한 ‘미디어 속 음주 조장 환경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서 관련 전문가들과 정책 입안자들이 한목소리로 주류 광고의 악영향과 폐해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국가기관 간에 전혀 상반된 방침이 나온 점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오유미 한국건강증진개발원 건강증진사업실장은 “유해한 주류 광고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선 현재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에 명시된 주류 광고 기준이 법률로 상향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술 역시 각종 매체를 통해 음주 장면을 자주 접할수록 소비가 늘어난다는 연구결과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일반에 노출되는 주류 광고 건수가 2018년 50만3591건에서 2019년 70만1529건으로 증가했고, 미디어 속 음주 장면 건수 또한 같은 기간 1183건에서 1780건으로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광고임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직접광고와 달리 방송의 한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삽입된 주류 가상·간접광고는 화면 속 등장인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음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상규 한림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주류 광고와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음주 장면이 실제 음주를 증가시킬 뿐 아니라 특히 여성과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주고 있어 이와 관련된 국내 규제가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 전반에서 ‘코로나 블루’를 호소하며 ‘혼술’이 기분전환을 위한 탈출구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강해짐에 따라 폭음과 주사 등 문제 음주행위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 때문에 타인과 직접 만나 술자리에 참석하는 빈도는 줄었지만, 방송을 보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음주하는 빈도는 오히려 늘었기 때문이다. 이해국 교수는 “특히 젊은 연령층의 여성과 청소년을 중심으로 문제 음주행위가 늘어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고, 코로나19로 고립감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며 “음주 예방에 투입되는 기금과 예산이 연간 15억원 수준에 그치는 데 비해 연간 주류 광고비용은 2000억원을 가뿐히 넘는 불균형 속에서 광고 규제까지 풀면 그 악영향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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