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옥자' 보고 돼지 구출 시도한 미국 동물권 활동가

오경민 기자 2021. 1. 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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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돼지에게 ‘타고난 팔자’란 무엇일까. 영화 <옥자>에서 옥자는 미국 기업 미란도 컴퍼니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슈퍼 돼지’ 중 한 마리다. 미란도 컴퍼니 홍보의 일환으로 옥자는 강원도 산골에 보내진다. 그곳에서 소녀인 미자의 자매이자 친구로 함께 자란다. 미자의 할아버지는 옥자의 타고난 팔자는 등심, 안심, 사태가 되는 거라며 미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 옥자를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미자는 옥자를 미국까지 쫓아가 미란도 컴퍼니의 실험실과 도살장에서 구출해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파머존 도살장으로 끌려간 그레타도 고기가 될 팔자로 태어났다. 영화 <옥자>처럼 대기업의 도살장으로 들어가 그를 구출하려 했던 동물권 활동가 니코 스터블러를 지난해 12월29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스터블러는 8년 전부터 비건(동물 식품을 먹지 않는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었고 DxE라는 동물권 단체에서 동물권 활동과 환경운동을 병행해왔다. 그는 2017년 <옥자>를 본 뒤 도살장에서 돼지를 구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난해 9월25일 새벽 동물권단체 DxE의 활동가들과 함께 미국 서부의 대형 도살장인 파머존 도살장에 잠입했다. 스터블러는 이 도살장이 “요새이자 감옥”이라며 <옥자>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돼지 도살장과 비슷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높은 벽과 울타리로 싸여 있으며 보안도 철저하다”고 했다. 파머존 도살장은 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가공업체인 스미스필드푸드 소유다. 세계 최대의 가공업체라는 말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돼지를 죽이는 기업이란 뜻이기도 하다. 스터블러에 따르면 이곳에서 매일 8000마리 돼지가 죽는다.

지난해 9월25일 미국 LA 파머존 도살장에서 그레타를 구출하는 DxE 활동가들. 니코 스터블러 제공.


지난해 9월 파머존 도살장 앞에서 48시간 점거 농성을 하던 DxE 활동가 중 니코를 포함한 7명은 직원 유니폼을 입고 도살장에 잠입했다. 활동가들은 가스실로 가는 수천 마리의 돼지들 중 136kg의 그레타를 빼내 들것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레타를 들고 나오는 도중 나가려던 방향의 문이 잠겼다. 7명의 활동가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레타는 가스실로 옮겨져 죽임을 당했다. 활동가들은 풀려났고 이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스터블러는 “그레타는 구조되지 못했지만 파머존을 비롯한 도살장에서 계속 동물들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터블러는 “돼지를 비롯한 모든 개별 동물들은 개·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살기를 원한다”며 “각자 고유한 성격과 호불호를 가지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도살장에 들어가 동물을 구하는 것은 개체들의 뜻을 존중하고 그 삶이 중요하다는 것(that life matters)을 인지하는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자유를 희생하더라도 그 한 개체의 운명을 위해 공개구조 했다”고 말했다.

스터블러는 <옥자>에서 미자가 슈퍼돼지 옥자를 구출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는 이전에도 동물을 구조한 적이 있지만, 교외에 위치한 농장에서 오리 같은 작은 동물을 구출했다. <옥자>를 보기 전에는 파머존 같은 큰 도살장에 잠입하거나 돼지를 구출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오리는 두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들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만 돼지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기자와 줌(zoom)을 통해 인터뷰 중인 니코 스터블러


채식주의와 비거니즘은 빠르게 대중화되고 있는 반면 방해시위나 공개구조는 운동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 DxE의 한국 내 단체인 DxE코리아는 무한리필 삼겹살 식당과 패밀리레스토랑 등에서 “음식이 아니라 폭력이다”를 외치거나 대형마트에서 포장된 고기 위에 조화를 놓는 등 시위를 했다. 지난해엔 경기 화성시 한 농가에서 돼지를 구조했다. 현행법상 영업방해나 절도로 간주되는 행동이다. 스터블러는 “법이 부당하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물을 구하는 활동가들이 기소되는 게 아니라, 동물들을 죽이는 기업이 기소를 당해야 한다”며 “우리가 하는 활동은 부당한 법을 없애고 바꾸는 ‘시민 불복종’”이라고 말했다.

그는 DxE의 동물 구조 활동을 노예 해방 비밀조직인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 활동에 빗댔다. 미국에 노예제가 존재하던 시절, 해리엇 터브먼 등이 주도한 지하철도는 노예에게 탈출 경로를 안내하고 은신처를 제공하하며 노예 해방운동을 했다. 스터블러는 “과거 미국 법은 아프리카인들을 재산으로 다뤘지만 그것은 잘못됐고 결국 그 법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옳았다”며 “동물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재산이나 상품이 아니라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개체로써 동물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터블러는 <옥자>가 공개구조를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알리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공개구조는 농장·도살장 등 현장에 들어가 비인간 동물이 처한 상황을 공개하고 감금된 동물을 구조하는 활동이다. 활동가들은 주로 구조 장면을 사진·영상 등에 담아 고발 영상 등을 만들어 알린다. 스터블러는 “공개구조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고발 영상 등은 많이 봤지만 <옥자> 같은 극영화는 처음이었다”며 “내가 아는 모든 동물권 활동가는 그 영상을 봤다.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은 활동가 외 사람들에게는 낯선 공개구조의 개념을 알리고 우리가 무슨 활동을 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했다”고 말했다.

그레타를 성공적으로 구조했다면 스터블러와 활동가들은 그레타를 생추어리로 보낼 예정이었다. 생추어리는 고통스럽고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동물이나 야생으로 돌아가기 힘든 상황의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공간이다. 축산 공장과 달리 동물이 자신의 본성을 유지하며 평생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스터블러는 “도살장 앞에 지프를 대기시켜 놨었다. 그레타를 생추어리로 이동시켜 그곳에서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동물권 단체인 DxE코리아의 자원봉사자들이 지난해 5월11일 오후 새벽이생추어리에 돼지농가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이’가 몸을 비빌 나무를 심고 있다. 권도현 기자.


한국에도 생추어리가 있다. DxE코리아는 2019년 7월 돼지농가에서 아기돼지 새벽이를 공개구조한 뒤 ‘새벽이생추어리’로 데리고 갔다. 새벽이는 겨울을 건강히 나고 있다. 새벽이를 구출했던 김향기 활동가는 “새벽이는 추운 겨울인데도 말도 못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그는 “이전에 봤던 도살장 앞에 트럭에 실린 돼지들은 계속 몸을 떨었다”며 “그 모습이 떠올라 새벽이의 겨울도 많이 걱정을 했지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뛰어놀며 추위에 적응해서 그런지 오히려 낮에는 더워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봄이 오면 새벽이생추어리에는 둘째가 입주할 예정이다. DxE코리아는 한 제약회사 연구소에서 탈출한 아기돼지 잔디를 활동가 자택에 보호중이다. 실험용 동물이었던 잔디는 혼자 회사를 탈출하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연구소의 직원이 잔디를 동물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안락사를 요청했다고 김 활동가는 말했다. 동물병원은 잔디가 회복하자 새벽이생추어리로 인계했다. 김향기 활동가는 “새벽이와 잔디는 단순히 귀엽고 특별한 돼지가 아닌, 살아있음으로써 동물 해방을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동물권 활동가”라며 “이들이 음식이나 동물실험 제품으로 소비되지 않고 삶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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