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인프피입니까? 엔프피라고요?

한겨레 2020. 12. 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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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밀레니얼 읽기][토요판] 밀레니얼 읽기
(2) MBTI에 열광하는 이유
각종 유형 테스트 유행한 2020년
융 심리학 바탕 MBTI 인기 높아
특별하고 불안한 '밀레니얼 세대'
타인과 구분하면서 안정감 추구
'진보냐 보수냐' 진영론 말고
재미있는 유형 속에서 '안도'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인기가 높은 성격 유형 검사. 16personalities.co.kr 화면 갈무리

비과학적인 것이라면 덮어놓고 경멸하던 시절이 있었다. 10여년 전 이야기다. 학교 다녀와서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친구 얘기를 한참 늘어놓는 나에게 엄마가 한마디 던졌다. “우리 딸은 O형이라 그런지 친구들을 참 좋아하네.” 준비된 것처럼 엄마를 향해 세모눈을 떴다. 순간 바뀐 내 표정에 당황한 엄마가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앞서서 와다다 쏘아붙였다. “엄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혈액형이랑 사람 성격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럼 세상에 성격이 네 가지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그런 식으로 사람을 판단해버리면 어떡해. 혈액형 성격론이라니, 너무 비과학적이잖아.” 논리와 과학의 신봉자이자,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무엇이라도 된 양 굴었던 중고교 시절이었다.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엄마를 냉철히 비판하던 나는 10여년 뒤, 누굴 만나 대화하다가도 자연스럽게 엠비티아이(MBTI)를 묻는 어른이 되었다. “엠비티아이가 뭐예요? 아이엔티제이(INTJ)? 그렇다면 당신은 내향적인 분이시군요.” 적어도 올 한 해 동안엔, 어떤 자리에 가든 엠비티아이만 물어보면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요즘의 나를 엄마가 보면 무슨 말을 할까? “너도 똑같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겠다.

이번 테스트 해봤어?

엠비티아이는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줄임말로, 올해 크게 유행했던 ‘인싸템’ 중 하나였다.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해 알려주는데, 그 바탕에는 카를 융의 ‘심리학적 유형론’이 있다. 이 유형론은 크게 주의초점, 인식기능, 판단기능, 생활양식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유형은 다시 외향성(E)과 내향성(I), 감각형(S)과 직관형(N), 사고형(T)과 감정형(F), 판단형(J)과 인식형(P)으로 나뉜다. “당신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까?” 따위의 질문 수십 개에 대답하고 나면 자신이 무슨 유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과학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근거가 없다고 무시하기에는 꽤 그럴듯한 분류법이다. 1990년에 국내에 도입되었다는데, 기업의 채용이나 학생들의 진로 파악에 사용되기도 했다가 최근 테스트가 온라인에서 크게 유행하면서 대중화됐다.

어디 이 검사뿐일까. 2020년은 거의 ‘테스트의 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각종 테스트가 유행했다. ‘나는 어떤 꽃 유형일까?’ ‘나는 어떤 호구 유형일까?’ ‘회사에서 나의 캐릭터는 무엇일까?’ 등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테스트가 인기를 끌었다. 워낙 이런 종류의 테스트가 유행하다 보니 기업들이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콘텐츠 플랫폼 ‘퍼블리’에서는 회사에서의 내 캐릭터를 알아보는 테스트를 제공한 다음, 결과를 확인하고 나면 그에 맞는 읽을거리를 추천하는 마케팅을 진행했다. 일정 시간 이상 집중하면 보상으로 나무를 키울 수 있게 하는 앱 ‘포레스트’에서는 자신의 식물 유형을 테스트하게 한 다음, 해당 식물을 보너스로 키울 수 있는 아이템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어쩌면 뻔한 마케팅이고 뻔한 테스트였지만 나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은 새로운 테스트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열광했다. 공유하고 묻고 모였다. 공감과 ‘좋아요’를 나누었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같은 유형의 사람들끼리 유대감을 형성하는 해시태그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엔에프피(ENFP·재기발랄한 활동가형)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특정 경험담을 올리거나, 자기소개를 올리는 소개란에 엠비티아이 유형을 기재하는 식으로 자신의 유형을 어필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튜브에서 음악을 선곡해 묶어내는 디제이 유튜버들은 자신이 고른 음악 세트 제목에 엠비티아이를 덧대기도 했다. ‘이엔에프피는 누르면 극락 갈 플레이리스트’(손다로우쉬), ‘사랑스러운 아이엔에프피(INFP·열정적인 중재자형)들에게 바치는 감성적인 팝송 모음’(소호) 같은 영상들이다. 엔프피(ENFP), 인프피(INFP)라고 유형들의 별칭을 간결하게 불러가며 공감하는 이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다. “아이엔에프피들 공감 1. 낯가림 2. 관종이지만 튀는 거 싫음 3. 외로운 거 싫지만 혼자 노는 거 개꿀잼 4. 화를 잘 안 내서 애만 태움 5. 사소한 거에 신경을 제일 많이 씀”(냥안) 같은 댓글은 ‘좋아요’를 무수히 받았다.

특별한데 불안한 나

엠비티아이는 이미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됐다. 왜 우리는 이런 테스트에 열광할까? 밀레니얼이라 불리는 우리 세대는 참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민주주의 세대, 전후 세대 같이 계급·계층과 무관하게 공통적으로 영향을 준 커다란 역사적 경험이 우리 세대엔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의 계층에 따라 계급 인식도, 세상에 대한 인식도 상이하다. 제각기 다르다는 점과 하나로 묶이기 어렵다는 점으로 묶이는 세대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나마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자신이 약간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는 점 정도겠다.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큰 의미 없고, 꽤 과학적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론 과학이라는 말을 덧대기는 어려운 이 성격 유형 검사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나’를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게 활용된다. 어릴 적부터 ‘너는 특별하다’는 주문 속에서 자라왔으면서도, 어느 선 이상 특별해선 안 된다는 제한 역시 받아온 밀레니얼 세대는 모호한 특별함과 개인주의 속에서 부유한다. 기존의 규정과 틀에 자신을 밀어넣기를 거부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의 규정에 묶이고 싶어 한다. 확신하거나 기댈 곳을 원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우리 세대의 기본 정서다. 완전히 자유롭기에는 너무 불안하다. 영영 하나로 묶이기에는 너무 오래 각자 ‘특별’해왔다. ‘나’는 남들과 다르지만, ‘이상’해서는 안 된다. 이 어중간한 안정감 속에서 ‘유형 테스트’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자아상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테스트를 통해 우리는, 타인과 나를 구분하면서도 안전한 유형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 앉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전의 세대가 조금 더 전통적인 사주풀이나 비과학적인 혈액형 유형 같은 것에 기대었다면, 요즘 세대는 나름대로 통계라 부를 수 있는 신유형 테스트에 자아를 의탁한다.

미국 예일대 로스쿨 에이미 추아 교수는 자신의 책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어느 집단이건 일단 속하고 나면 우리의 정체성은 희한하게도 그 집단에 단단하게 고착된다”고 썼다. 그는 미국 정치를 분석하면서 진영논리보다 앞서는 것이 ‘부족주의’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던 계급이나 계층이 아닌 ‘부족’이라는 새로운 묶음이 사람들의 정치적 의식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세대 또한 ‘새로운 부족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자신을 진보, 보수, 중도 같은 정치적 언어로 설명하기보다는 ‘인프피’나 ‘엔프피’로 소개하는 편이 조금은 수월하니까. 나를 비롯한 친구들의 정체성은 그 수월하고 비정치적인 어디쯤에서 달랑거리는 중이다. 우리는 어쩌면, 전혀 정치적이지 않다는 측면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재미있고 안전한 16가지 유형의 틀 안에서 약간은 안도하는 중인 것 같기도 하다.

천다민 뉴닉 에디터

▶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들은 정보기술(IT)에 능하고 개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고 분석된다. 부당한 일에 적극 목소리를 내면서 앞날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툭하면 가르치려는 ‘라떼 세대’는 모르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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