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귀성 대신 택한 봉사.. 무료급식은 추석에도 멈출수 없었다

이승엽 2020. 10. 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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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도 무료급식소 운영하는 '안나의집'
고향 못 찾는 노숙인·독거노인 600명 몰려
추석 당일이었던 지난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 앞 도로변에서 한 노숙인이 안나의집에서 받은 도시락을 먹고 있다. 이승엽 기자

"우린 이름 같은 거 없는 사람들이야. 그런 거 물어보지마."

1일 한가위 오전, 여느 가정에서라면 차례를 마친 가족ㆍ친지들이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무렵. 경기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성당 주차장에 600명이 넘는 노숙인들이 모여들었다. 한 사람마다 2m씩 간격을 두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은 하나 같이 눈에 초점이 없었다. 대부분 60대 이상 고령자인 이들의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모를 정도로 헝클어지고 빳빳했다. 새까맣게 때묻은 마스크를 낀 그들은 뭔가를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한 노인은 폐지로 가득 찬 리어카에 간신히 몸을 기대 서 있고, 밑창이 터진 운동화를 신고 있던 40대 남성은 아예 드러누워 하늘만 쳐다 보고 있었다.

주차장이 노숙인들로 가득 차자, 미처 성당 구역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줄까지 생겨났다. 그 줄이 어찌나 길었던지, 성당 담벼락을 따라 'ㄴ'자로 늘어져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됐다.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성남동성당 주차장에 노숙인들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이승엽 기자

한가위에 집이나 고향을 찾지 못하고 성당 주차장으로 온 이들은 주거지 없이 떠도는 노숙인, 쪽방촌ㆍ고시원 등에 거주하는 독거노인들이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에 온 김하종(63ㆍ이탈리아명 빈센초 보르도) 신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안나의집'에서 나눠 주는 도시락을 받기 위해 여기 모였다. 치매를 앓는 90대 노모와 함께 온 70대 아들, 장애를 가진 50대 아들의 휠체어를 밀고 온 70대 아버지, 사업에 7번 실패한 뒤 노숙을 하고 있는 70대 남성 등 저마다 사연도 기구했다.

풍성한 결실을 나누는 민족 최대 명절임에도, 갈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이들에겐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다. 무리 속에서 만난 70대 후반 한 노인은 "나한테는 고향도, 명절도 없다. 그저 끼니를 해결하러 왔다"고 말했다. 닳아빠진 검정색 반팔 티셔츠에, 싸구려 등산 가방을 메고 있던 그의 새까만 맨발에는 금방이라도 줄이 끊어질 듯한 슬리퍼가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70대 초반 다른 노인도 "어제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라며 "차라리 코로나에 걸리고 싶다"고 읊조렸다.


코로나로 급식소도 타격... 전국서 노숙인ㆍ독거노인 줄이어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성남동성당 앞 인도에 노숙인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승엽 기자

안나의집이 이런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무료급식소를 운영한 지는 올해로 29년째다. 이탈리아에서 온 김 신부가 성남시에 자리잡은 1992년 이후 일요일을 빼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명절도 거르지 않고 늘 노숙인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해 온 곳이다.

늘 꾸준했던 안나의집이었지만 올해만큼 형편이 좋지 않은 적도 없었단다. 코로나라는 재앙은 가장 낮은 곳으로 몰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인 무료급식소에게 더 가혹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실내 급식소 운영이 어려워지자, 안나의집은 맞은편 성당 주차장에서 도시락으로 대체해 끼니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대부분의 급식소가 신종 코로나로 운영을 중단한 가운데, 지금도 운영을 계속하고 있는 곳은 안나의집이 거의 유일하다. 덕분에 전국 각지 노숙인들이 이곳에 몰려들고 있다. 매일 5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던 안나의집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어나자, 없는 형편에 마른 행주 쥐어짜듯 650명분으로 하루 제공량을 늘렸다. 도시락 하나를 받으러 대전에서 성남까지 왔다는 70대 후반의 한 남성은 "먹을 게 없어 일주일에 2번 정도 이곳에 온다"고 했다. 이곳에서 받은 도시락 하나로 이틀 끼니를 때운다는 그는 성남까지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껌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먹여야 할 입은 늘었지만 후원은 줄었다. 기업이나 개인들의 주머니 사정도 신종 코로나로 좋지 않아져 기부금 액수가 예년보다 줄었다고 한다. 또 포장 작업, 체온 검사, 안전거리 유지 등에 필요한 인원까지, 코로나 방역 때문에 필요한 일손도 늘어 고충은 배가 됐다.


"자원봉사자 부족할 줄 알았는데..." 평소보다 2배 넘게 몰려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도시락을 포장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안나의집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하루를 나눠 주는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김 신부는 "매일매일이 기적 같다"고 했다.

추석 당일인 1일 안나의집을 찾은 자원봉사자는 58명. 평소(보통 25명)의 2배가 넘었다. 비대면 추석 쇠기 운동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이들이 한걸음에 달려온 덕분이다. 평소보다 많은 일손 덕에 650개 도시락 포장도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끝났다. 경기 광주시에 사는 윤용선(57)씨는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오후에 할 일이 없어 왔다"며 "20년 가까이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이분들이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제가 더 즐겁다"고 말했다.

안순희(48) 안나의집 조리사는 "봉사자가 너무 많아 놀랐다"면서 "추석이라 인원이 적을까봐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며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미소지었다.


8년째 명절 '개근'... 처음 봉사 온 대학생들도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임태중씨. 이승엽 기자

이날 만난 봉사자들은 모두 자신을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직장에서, 또 학교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이들은 "왜 남들 쉬는 추석에 이곳에 왔나"는 기자의 질문에 "오히려 '빨간 날'이라 올 수 있었다"며 입모아 말했다.

'청소 담당'인 임태중(65)씨는 이날이 안나의집에서 보내는 8번째 추석이었다. 김 신부와의 인연으로 명절과 휴가 때마다 아내, 두 자녀와 함께 이곳에 온다는 임씨는 설거지부터 화장실 청소 등 뒷정리를 도맡아 하고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봉사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이 하지 않는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천주교 신자인 민용식(64)씨는 자녀들에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 오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자신은 안나의집을 찾았다. 최금덕(69)씨는 9년째 전국 무료급식소만 돌며 봉사하는 무료급식 전문 봉사자다. 눈에 익은 노숙인들이 명절에 잘 지내고 있나 걱정이 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단다.

이번 추석을 맞아 안나의집을 처음 찾은 이들도 많았다. "추석에 할 게 없어서" 왔다는 대학생 김동환(24)ㆍ최상민(24)씨는 조리실에서 성당까지 도시락을 옮기느라 옷이 땀에 흠뻑 젖었다. 안나의집에서 운영하는 쉼터 공부방에서 영어 교사를 했던 이주연(41)씨는 "손길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급식 봉사에 처음 나왔다"고 했다.


신부 및 봉사자들 "밥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싶다"

김하종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이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성남동성당 주차장에 모여 있는 노숙인들에게 추석 인사를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명절 잘 보내세요. 사랑합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오후 3시부터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 노숙인들에게 전달됐다. 봉사자들은 도시락뿐 아니라 노숙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김 신부와 자원봉사자들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며 추석 인사를 전하자, 주차장에 모인 수백명의 노숙인들도 함께 하트를 그리며 답했다.

이날 메뉴는 무말랭이 무침이 올라간 불고기덮밥과 미역국. 안순희 조리사가 명절을 맞아 없는 살림에 특별히 준비한 추석용 메뉴다. 추석 선물도 추가됐다. 배와 사과, 라면과 음료수, 칫솔세트와 틀니 세척기 등이 곱게 포장돼 노인들의 품에 하나씩 안겼다. 쌀쌀해지는 가을 날씨를 대비해 준비한 새 옷 선물도 있었다. 한 의류업체에서 재고 물품을 기부 받아 노숙인 한 명, 한 명에게 빠짐없이 하나씩 전달됐다.

그 자리에서 바로 자켓을 걸쳐 입은 노인이 "고마워"라고 인사를 건네자, 종신서원(일생을 하느님에게 바치기로 하는 서약)을 앞두고 한 달 실습을 나온 수녀가 "잘 맞네요, 멋있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김 신부는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이렇게 선물을 드릴 수 있어 기쁘다"라며 "평소엔 꿈도 못꾸는 일"이라고 했다.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성남동성당에서 안나의집 자원봉사자들이 노숙인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이날 안나의집에서 나눠 준 도시락으로 노숙인들은 며칠을 버틴다. 대부분 도시락을 배낭에 고스란히 넣어 집으로 가져갔다. 서울 송파구 가락동 한 고시텔에서 사는 김모(67)씨는 "도시락과 라면이면 이틀 끼니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허기를 참지 못한 일부는 근처 공원이나 도로변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내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기도 했다. 간신히 허기를 달랜 이들은 누군가 버린 꽁초를 주워 담배를 피웠다. 이가 모두 빠져 불고기를 잇몸으로 씹어 삼키던 한 80대 노인은 "맛있어. 추석상이 안 부럽네"라고 말했다.

김 신부는 안나의집이 밥 아닌 사랑을 나눠주는 곳이라고 했다. 김 신부는 "사람은 30일 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3일 동안 사랑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서 "이들이 밖에서는 더럽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이곳에서 만큼은 존댓말로 환영 받고 따뜻한 인사를 받는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걸 여기서나마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이어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때지만 오히려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면서 "후원금 기부는 줄었지만 음식이나 빵 등 물품 기부는 늘었고, 봉사하시는 분들도 많아져 희망이 생긴다"며 앞으로도 무료 도시락 봉사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기자가 안나의집을 다녀간 다음날인 2일. 안나의집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66명의 자원봉사자가 찾아왔다고 한다.

1일 오후 경기 성남시 안나의집에서 김하종 신부가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승엽 기자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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