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장기수' 강담 선생 끝내 타계

정지윤 기자 2020. 8. 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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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2018년 7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인터뷰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의 모습/정지윤기자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이 지난 21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7세. 2차 송환 희망자였던 선생은 올해 초 폐암 4기 판정을 받은 후 충남 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활해왔다. 선생은 모임이나 집회 때마다 늘 멋진 양복에 색깔 있는 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등장해 ‘멋쟁이 장기수’로 불렸다. 폐암 말기의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북측에 있는 외동딸과의 재회를 꿈꾸며 송환을 기다려 왔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지난 2018년 7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인터뷰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의 모습/정지윤기자


선생은 함경남도 홍원군 산양리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문 앞에 학교를 두고도 다니지 못했다. 9살 때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사망했다. 선생은 짚신 삼고 나무하고 소 먹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이 되어서야 학교를 다녔다. 17살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지원했다, 하지만 몸이 약해 참전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고서 입대해 해군에서 8년을 근무했다. 제대 후에는 3등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해 청진수산사업소에서 화물선 갑판원으로 일했다. 그사이 결혼해 아들 둘을 두었다. 1964년 8월 중앙당에 소환돼 고성 해금강 부대에 배치되었다. 선생의 임무는 남파공작원들을 배에 태워 남쪽의 접선 장소까지 보내는 일이었다. 그해 11월 첫 임무를 맡아 주문진까지 내려갔지만 배가 암초에 부딪혀 되돌아와야 했다. 한 달 뒤 2차 시도 때는 속초까지 내려갔지만 발각되고 말았다. 남측 경비정을 따돌리고 간신히 귀환했다.

지난 2018년 7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인터뷰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의 모습/정지윤기자


이듬해 3월 3차 시도를 하루 앞두고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아내와 영화를 함께 봤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 맞선 소비에트군이 수도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내용의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아내에게 만약의 일을 당부했습니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다음 날 선생은 강원도 통천항을 출항해 남쪽으로 향했다. 8명이 타고 있던 공작선은 공해상에서 통신이 두절되었다. 해상에는 높은 파도와 폭설로 시야가 좋지 않았다. 울릉도 부근 해상에 도착했을 때 구축함에 발각되고 말았다. 일장기를 올린 채 일본어선 흉내를 냈지만 부질없었다. 기관장이 자폭용으로 뽑아든 수류탄이 불발되면서 선생을 포함한 8명의 공작원이 모두 생포되었다.

지난 2018년 7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인터뷰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이 쓰고 있는 일기장을 보여 주고 있다./정지윤기자


방청객도 없는 비밀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서대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좁은 응달 방에 열 명씩 들어찬 감방은 춥고, 배는 허기졌다. 집요한 전향공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1973년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선생은 무자비한 고문 끝에 강제 전향했다. 당시 고문과 구타로 고막이 터져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24년을 감옥에서 보낸 선생은 1988년 출소했다. 선생의 나이 55세 때였다. 가구공장과 막노동 현장을 옮겨 다녔다. 사업을 시작했다가 여러 차례 부도를 맞았다. 그 후 아파트와 성당 경비 등을 맡아 일했다. 1989년에 지인의 소개로 14살 아래인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아이는 낳지 않았다. 2005년 선생은 모델하우스 경비 일을 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초기 대응이 빨라 위기는 넘겼지만 왼쪽 팔과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었다. 2012년에는 전립선암 판정까지 받았다. 그러다 2017년 다시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이제 진통제를 맞지 않으면 밖에 나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당과 조국, 민족을 위해 한길을 살아왔습니다. 많은 일을 더 하고 싶지만 이제 몸이 따라 주지를 않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조국통일에 일조하며 뜻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선생의 마지막 바람이었다.

지난 2018년 7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인터뷰 당시의 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의 모습/정지윤기자


빈소는 서울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다.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지며 추도식은 23일 오후 4시. 발인은 24일 오전 11시. 장지는 서울 종로구 금선사이다.

2000년 9월 2일, 6·15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판문점을 통해 북측지역으로 건너갔다. 그날로부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1차 송환 대상으로 분류되었지만 미처 신청하지 못했거나, 잔혹한 고문에 강제전향당한 경우, 그리고 정전협정 이후 송환되었어야 할 전쟁포로이면서도 오히려 수십년 징역을 살았던 전쟁포로 출신 등 33명은 1차 송환에 함께 하지 못하고 20년째 2차 송환희망자로 남았다.

지난 2018년 8월 2일. 청와대 분수대 앞에 선 양원진, 김영식, 강담, 양희철, 김영식 선생(왼쪽부터)/정지윤 기자


하지만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이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13명만 생존해 있다. 이광근,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희성, 박순자,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양희철 선생이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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