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 그 악마는 반성 안 했어요" [미투, 그 이후의 삶]

배민영 2020. 8. 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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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법도 믿을 수 없는 현실
3년 사귀었던 남성의 불법촬영물 유포
"피고인 잘못 인정" 판결문에 두 번 상처
가해자 위증 불구 피해자 무고 처벌도
A씨가 자신의 신체를 촬영해 인터넷에 유포한 옛 남자친구를 엄벌에 처해달라며 작성한 자필 탄원서. 1심은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속옷 차림 사진을 동의 없이 인터넷에 올린 일부 혐의는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라고 봤다. A씨 제공
#.“판결문 문장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A씨는 지난 6월 법원에서 받아본 1심 판결문을 보면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옛 남자친구는 A씨의 허락 없이 신체를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징역 8개월에 법정구속됐다. A씨는 무엇보다 법원의 감형 사유에 충격을 받았다. 판결문에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다”, “처음부터 외부로 유출할 목적으로 촬영된 것은 아니고 모자이크가 돼 있어 누군지 알아보기 어렵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속옷만 입은 모습이 담긴 사진을 동의 없이 유포한 일부 혐의는 “성적 부위나 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 또는 묘사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세계일보와 만난 A씨는 “남자친구는 용서를 구한 적도, 사과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인정한 불법 촬영물 개수만 해도 동영상 24개, 사진 8장에 달한다. 범행도 3년 동안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법원의 감형 사유는 납득할 수 없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A씨는 “판결문을 받아보고 몸져누웠다”며 “지금은 합의를 요구하는 옛 남자친구 측 변호인 등과 접촉을 피하려고 ‘도피 생활’을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현재 이 사건은 2심 진행 중이다.

◆가해자 사과를 대신 받아주는 법원

A씨처럼 성범죄 피해 못지않게 법원 판단에 상처를 받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특히 피해자 본인은 전혀 모르는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감형으로 이어지는 등 감형 사유에 대한 비판이 크다. ‘피해자 중심’과는 거리가 먼 판결이 이어지면서 사법부가 오히려 ‘미투’ 폭로자나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축시키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서혜진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판결문상 양형 이유에 분노한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 촬영물은 유포돼 어떻게 돌아다닐지 모른다. 그러나 초범이면 단순히 벌금 200만원 또는 기소유예 처분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법률사무소 큰길 이수연 변호사도 “법원은 판결문에 피고인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형식적으로라도 쓴다. 큰 의미를 두고 쓰는 게 아니다. 피해자는 알 수 없는 내용이다”라고 지적했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W2V)를 운영한 손정우가 미국 송환이 불허된 지난달 6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고 있다. 뉴스1
일명 ‘웰컴투비디오’ 사이트에서 아동 성착취물을 유통한 것으로 조사된 손정우도 지난해 5월 2심 판결 직전 혼인신고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은 이를 ‘유리한 정상’이라고 봤다.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던 그는 비록 2심에서 법정구속됐지만, 형량은 징역 1년6개월로 줄었다.

사정이 이러니 감형 노하우를 사고파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불법촬영·성폭행 등 사건 가해자들이 인터넷 카페에서 모여 입건 시 대처 노하우를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인 사건의 법원 판결문이나 검찰의 불기소 이유 통지도 활발하게 유통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불기소 또는 감형을 받는 데 도움이 되는 반성문·탄원서 양식을 사고파는 ‘시장’이 상시 운영되는 상황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월 “법원이 지나치게 관대한 감경 기준을 적용할 때 성폭력에 둔감해지는 분위기가 조장되고 성폭력을 묵인하는 결과가 초래된다”며 성범죄자 양형 기준을 손질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사법부의 솜방망이 판결은 이어지고 있다.

법무법인 태율 김상균 변호사는 “피해자 측 변호사로서는 피고인이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실제 반성하지 않고 있음을 재판에서 부각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며 “실제 반성할 사람이면 그런 행동을 했겠나. (감형받으려고) 판사에게 사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성인지 감수성 부족한 법원

미투 운동의 확산에도 여전히 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법조계에서 성인지 감수성은 사법기관이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맥락의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재판에 어떻게 ‘감수성’이 개입할 수 있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서혜진 변호사는 “방점은 (감수성이 아닌) 성인지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성범죄 사건은 남성 입장에서 보면 무죄인 경우가 많다”며 “(사건을) 피해자 입장에서도 꼼꼼하게 잘 살펴보라는 게 성인지 감수성”이라고 강조했다.

성범죄 사건에서 사법부의 성인지 부족은 때로 확정판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직장 동료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지만, 정작 자신이 무고죄로 역고소당해 실형을 선고받았던 B씨 사례가 그런 경우다. B씨는 2018년 4월 1심에선 무죄였다. 그러나 지난해 2월 2심은 그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그로부터 약 4개월 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사건 쟁점은 B씨가 사건 당시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었는지 여부였다. 이를 살펴보기 위한 핵심 증거는 성관계 당시 남성의 휴대전화에 담긴 녹음파일이었는데, 남성은 B씨가 말을 제대로 못 하거나 남자친구 이름을 반복적으로 부른 부분을 일부러 삭제해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B씨가 술에 취했던 정황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여서다. 그러나 2심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오히려 정당화했다. 이후 B씨는 이 남성을 모해위증 등 혐의로 재차 고소했고 남성은 벌금형을 확정받았다. B씨는 현재 무고죄 사건에 대한 재심을 준비 중이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재판부 행태도 여전히 존재한다. 김상균 변호사는 “가해자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면 피해자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야 하는 입장”이라며 “얼마 전 이런 사건 재판에서 차폐막을 설치해 가해자(피고인)가 피해자를 볼 수 없도록 보호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전했다.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법무법인 윈앤윈 장윤미 변호사는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에 따른 판단을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웃음 표시 이모티콘을 문자로 보내거나 고소 시점이 피해 시점과 다를 경우 피해가 없었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정지혜·박지원·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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