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요인 김원봉, 서훈 '논란'..이유는?

박민철 입력 2019. 4. 10. 21:35 수정 2019. 4. 10.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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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내일(11일)이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기 한장의 사진, 보실까요. 1942년 10월, 중국 충칭에서 찍은 사진인데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들, 백범 김구와 신익희, 조소앙 선생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독립운동의 거목들 사이로 다부진 눈매를 한 남성이 눈에 띕니다. 약산 김원봉입니다. 대표적 무장투쟁 독립운동가죠.

최근 정치권에서 약산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원봉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의열단장도 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 혁혁한 독립운동을 했지만 월북했다는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독립운동과 서훈, 그리고 월북의 문제로 인한 논쟁, 짚어보겠습니다.

박민철 기자의 보도 보시죠.

[리포트]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입니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1919년 11월부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은 1920년대 항일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민족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잇따라 폭탄을 투척하면서 일제에겐 공포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김원봉은 1938년 조직적인 무장 독립 운동을 위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합니다.

[김원봉/조선의용대장 :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해방의 선봉대로서 천백만 자기의 동포를 환기해서 조선민족해방을 쟁취하려는 것이오."]

이후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 광복군 부사령관과 군무부장에 잇따라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1948년, 평양을 방문한 뒤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북한 정권 초기에는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등을 맡았지만 결국, 1958년 북한 정권에 의해 숙청됐습니다.

그 뒤 이념 대립이 격화되면서 김원봉은 남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잊혀진 이름이었던 김원봉이 다시 알려진 건 2005년, 김원봉의 동생이 보훈당국에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며 신청서를 내면서부터였습니다.

[김태영/김원봉 조카 : "김원봉의 행적에 의해서 좌우로 나눈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얘기고, (서훈 수여를 통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의 상징적인 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올해 2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에서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권고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야권에서 강하게 반발하면서 김원봉은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KBS 뉴스 박민철입니다.

박민철 기자 (mcpark@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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