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이후 1500년, 왕조는 바뀌어도 지배 엘리트는 동질했다"

김유진 기자 입력 2018. 11. 22.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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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50년간 한국 연구한 도이힐러 교수
ㆍ‘조상의 눈 아래에서’ 번역 출간
ㆍ“친족 이데올로기가 사회 규정”

‘신라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왕조의 성씨가 바뀜에 따라 사회를 주도한 세력들도 달라졌다’는 것은 한국사에서 오래 전해 내려온 상식이다. 스위스 출신 세계적인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명예교수(84·사진)는 사뭇 다른 견해를 밝힌다. 5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1500년간 한국 사회를 이끌어 온 지배집단은 사실상 동질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토록 대담한 주장을 펴는 까닭은 씨족이나 족, 겨레 등으로 불리는 ‘출계집단(出系集團·descent group)’의 존재 때문이다. 출계집단은 “공동의 조상으로부터 혈통을 추적하는 친척의 집합체”를 뜻하는데, 이들은 줄곧 한국 엘리트 사회의 기본 단위를 구성했다. 양반, 사족 등 명칭이 어떠하든 엘리트층은 스스로를 자신의 출생 배경, 조상을 통해 정의했다. ‘친족 이데올로기’는 신라 시대 골품제가 등장한 4~5세기 무렵부터 조선 후기인 19세기 말까지 한국 정치·사회를 규정했다는 것이 도이힐러의 시각이다.

도이힐러가 최근 신작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의 번역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찾았다. 이 책은 그가 50년간 매달려 온 한국사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2015년 하버드대 출판부에서 출간됐다. 각주를 포함해 1000쪽에 달하는데, 한국 전통사회 엘리트 집단의 원형을 포함해 사회사 측면에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줬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 20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한국 역사를 보면 사회적 배경이 정치적 성취보다 중요했다”며 “왕조가 교체돼도 엘리트 집단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도입한 과거제나 ‘신유학’도 위계질서를 허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양반에 속하지 않으면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구별이 매우 심했던 것이죠. 엘리트가 유교를 받아들인 것도 출계집단을 부계로 제한시켜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트가 이렇게 뿌리내린 사회는 세계에도 별로 없습니다.”

그의 관점은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건국했다고 보는 한국사학계의 ‘정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도이힐러는 이날 “이기백 교수 등이 조선 초기 시골 출신 향리 후손들이 시험을 거쳐 등용되면서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고 봤지만, 실제로 여말과 선초의 엘리트는 똑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고려의 세족이 조선의 사족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도이힐러는 엘리트 집단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조사를 벌였다. 안동과 남원 지역을 방문해 문중이나 양반 후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엘리트층은 유교의 특정한 교의, 특히 남계친 중심의 의례적 의식과 승계의 원리를 취사선택하여, 출생과 출계에 기초한 자신들의 귀족적 특권을 강조하고 엘리트 출계집단의 성원권을 제한했다”며 “한국식으로 해석된 유교는 사회적 차별을 완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문중’이라는 독특한 ‘비공식 집단’에 대해 “부계사회에서는 장자가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이 상속하게 된다”며 “과거의 양계적 관념에 따라 형제간 평등을 지향하는 문중을 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이힐러는 해외 한국학 1세대 연구자였던 고 에드워드 와그너 하버드대 교수의 제자로, 존 덩컨(UCLA), 고 김자현(컬럼비아대) 등과 더불어 대표적 2세대 한국학자로 꼽힌다. 1960년대 서울대 규장각에 유학했던 최초의 외국인 중 한 명인 그는 “한국학자가 많아졌지만 마을(현장)보다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들여다보는 ‘암체어 스칼라’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 아쉽다”고도 말했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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